논단

 

‘핵무기의 문학’으로 회고록 읽기

 

 

구갑우 具甲祐

북한대학원대 교수. 저서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국제관계학 비판』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복지국가로』(공저) 등이 있음. kwkoo@kyungna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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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정보처리과정에 비유되곤 한다. 정보를 부호화하고 저장하며 검색하는 두뇌의 능력이 기억의 일반적인 정의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가 작동하는 과정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처럼 기계적이지 않다. 인간도 컴퓨터처럼 내외장 하드디스크에 기억을 저장할 수 있지만, 인간의 기억‘하기’는 선택적이고 해석적인 과정이다.1) 인간은 자신에게 핵심적이고 유용한 것만을 기억하려는 능동적 경향이 있다. 핵무기에 관한 네권의 회고록2) 읽기를 시작하며, 기억과 기억하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회고록이 저자의 기억을 재현한 것이라는 가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기가 주체의 필요에 따른 개입인 정치과정을 수반한다면, 회고록이라는 형태의 재()-현()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언어를 매개로 한 재현의 원초적 불가능성과 더불어 회고록의 저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기억의 편파와 편리 때문이다. 기억하기 자체가 걸러짐이라면, 기억을 글로 재현하는 과정은 다시 한번의 걸러짐이다. 기억한다고 해도 반드시 글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하고는 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기억하는 것보다 더 말하고 싶은 것이 회고록이라는 기록에는 공존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과소화와 기억의 과대화는, 기억할 때는 물론 기억을 쓸 때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3) 회고록을 읽을 때, 이 ‘이중의 걸러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치인의 회고록을 정치사나 외교사 연구자들이 사료로 쓰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고록은 본질상 재구성된 기억을 편파적으로 기록한 자기재현의 ‘문학’으로 읽혀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발견하는 회고록 쓰기는 정직과 참회가 아니라 불가피하게 동상을 세우려는 작업이다. 따라서 회고록은 재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식이지만, 재현 ‘여부’를 둘러싼 불가피한 논쟁을 야기함으로써 현실의 재현에 근접해가는 문학이다. 회고록의 ‘문학 되기’가 회고록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회고록의 문학 되기는, 자위적 회고록이 아니라면, 회고록을 쓰는 이유가 과거의 기억 ‘불러오기’를 통해 미래의 기억 ‘만들기’를 하는 것이라 할 때, 회고록의 본질에 좀더 부합하는 일일 수 있다. 핵무기의 국제정치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담은 문학이 없는 시대에 네권의 회고록을 ‘핵무기의 문학’으로 읽어보려 한다. 특히, 냉전의 전사에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위한 활동가로 전향한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스스로 “선별적 회고록”이라 이름붙인, 윌리엄 페리(William J. Perry)의 『핵 벼랑을 걷다』(My Journey at the Nuclear Brink, 이하 『벼랑』)를 축으로, 2차대전부터 시작된 국제정치의 핵심 의제인 핵 문제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상상력에 대한 진술의 교차검증적 읽기를 시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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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가 『벼랑』에서 선택한 경구 가운데 하나는, “고삐 풀린 원자의 힘은 인간의 사고방식을 뺀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그래서 우리는 유례없는 재앙을 향해 떠내려간다”(37면)라는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말이다. 페리는 일본에서 군인으로서 핵참사를 목격한 후 아인슈타인의 이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뺀”이라는 구절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의 생각은 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40면). 그러나 과연 인간의 사고방식이 바뀌었을까. 페리는, “오늘날 핵으로 인한 참사의 위험은 냉전시대보다도 더욱 크다”(5면)고 말한다.

핵무기의 출현이 국제정치에 미친 결과는 체제전복적이었다. 인류역사상 어떤 무기도 국제정치의 구조를 결정하는 변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예외였다. 그 파괴력 때문이다. 2차대전 이후 핵국가는 냉전체제하에서 강대국과 동의어였다. 핵무기의 파괴력은 핵국가에 비핵국가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을 부여했다. 미국의 핵독점체제에서 19498월 소련의 핵실험 이후 핵복점체제로 이행했고,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핵과점체제가 형성되었다. 핵독점체제에서 핵복점체제로 이행한 후에는, 핵국가들의 관계에서 공멸의 핵전쟁을 예방하고자 하는 핵억제의 개념이 등장했다. 핵무기는 한편으로 매력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포이기 때문이다.

억제란, 일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상대방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보복이나 처벌을 가하겠다는 조건부 약속이다. 국제정치에서 상대방의 군사적 공격을 예방하기 위한 억제는 효과적인 군사적 능력에 기초한다. 억제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결의로 표현되는 처벌의 위협을 상대방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억제는 상대방의 ‘인정’을 포함하는 소통과 약속의 협력게임이다. 핵무기에 의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에 대한 인식공유라 할 수 있는 냉전시대 미소 간 공포의 균형은 핵억제가 만들어진 대표적 사례다. 『벼랑』은 이 균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핵 아마겟돈을 막기 위한 것으로는 MAD의 원칙이라는 암울한 실용주의밖에는 없었다. 서로가 갖고 있는 이 공포가 제 역할을 하려면 언제나 합리적이고 상황에 정통한 주자들이 양편 모두에 있어야 했다. 더불어 한없는 행운 역시 필요했다.(45면)

 

한국의 국제정치비평가 리영희(李泳禧)도 “‘MAD(광증, 미친 상태)”가 “쌍방 세계의 전체 비전투원을 볼모로 잡고 있는 까닭에 군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것으로 자주 비난받았다”라고 적은 바 있다.4) 암울한 실용주의가 불가피했음을 인정하면서도 『벼랑』이 공포의 균형을 정상상태로 보는 국제정치이론과 구분되는 첫번째 지점은 ‘행운’에 대한 강조다. 꾸바 미사일 위기(1962) 시 미국이 설정한 꾸바 봉쇄선에 대응해 소련의 잠수함에는 핵어뢰가 장착되어 있었고, 함장은 모스끄바의 승인 없이도 핵어뢰를 발사할 수 있었지만 다른 장교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페리가 국방차관으로 재직할 때는, 북미대륙방공군사령부의 당직 장교가 자신의 컴퓨터에 지금 소련에서 미국의 목표물을 향해 비행 중인 200대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나타났다고 보고해오기도 했다. 훈련용 테이프를 실수로 컴퓨터에 설치해서 발생한 문제였지만, 페리에게는 핵전쟁이 우연찮은 사고로 발발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106면). 그는 “대통령이 전후사정을 알지 못한 채로 몇분 안에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핵경보 결정과정에 심각한 결함이 있”고, “그러나 우리의 결정과정은 당시 그런 방식이었고,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임을 강조한다(108면).

두번째 지점은, 페리가 “무기통제와 핵무기 감축이 핵참사의 위험을 줄이고, 고삐 풀린 ‘공포를 통한 균형상태’를 깨고 역전시키는 데 핵심이라고 믿었다”(67면)는 것이다. 재래식 병기에서 소련의 양적 우세를 상쇄하여 다시 대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핵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반적 계획인 이른바 ‘상쇄전략’을 추구하면서도 핵공격에 대한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무용한 일임을 페리는 깨닫고 있었다.

 

핵공격에 대한 방어체계의 타당성을 알아보기 위해 진행된 계산은 오히려 핵공격의 파괴력에 맞설 이렇다 할 방어책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의미있는 방어라면 오직 공격이 벌어지기 전에 막는 것뿐이었다.

난 우리의 최우선과제는 핵공격에 대한 무가치한 방어체계에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라 그 공격을 방지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근본적인 깨달음이 국방분야에서 일하는 내내 내 삶의 지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