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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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 韓雪

연세대 치의학과 2학년. 1996년생.

ppooeett@naver.com

 

 

 

석양이…… 진다

맥크리의 시론, 또는 김승일의 시론

 

 

1. 내 이름은 맥크리

 

하이퍼 FPS(1인칭 슈팅게임)를 표방한 온라인게임 ‘오버워치’에서 제시 맥크리는 가장 개성이 강한 캐릭터 중 하나다. 맥크리는 원래 불법 무기거래로 악명 높았던 갱단 데드락의 일원이었으나, 세계정의를 목표로 하는 범국가적 조직 오버워치의 함정수사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개였다. 평생 감옥에서 살거나 오버워치 내 비밀조직인 블랙워치에 합류하거나.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블랙워치에 합류한 그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세계정의라는 오버워치의 이상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덧 그는 세상의 부조리를 자신의 손으로 바로잡음으로써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을 속죄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문제로 인해 오버워치가 와해되면서 블랙워치 역시 해체되었고 맥크리는 홀연히 잠적한다.

그로부터 몇년 후 맥크리가 시집을 썼다는 이야기가 세상을 떠돌았다. 단순한 풍문으로 넘어가기에는 이야기에 무게가 있었다. 소문의 흔적이 흐릿해질 쯤 우리는 드디어 맥크리의 시집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되었다. 『에듀케이션』(김승일, 문학과지성사 2012).

 

식기 시작한 것들은 미끄러웠어 할머니가 쏟은 가래, 도롱뇽 알, 갓난아이, 녹조 위로 떨어지는 햇볕, 개천으로 뛰어드는 친구들, 친구들을 따라 뛰어드는 나, 딛는 곳마다 물이끼가 밟히고 수온은 미지근했지

 

(…)

 

나도 따라 걸었어 우리는 네 마리 도롱뇽들 물을 너무 마셔서 콧물만 나왔어

 

야광 잠바를 입은 친구가 신발 사러 엄마랑 백화점에 간대 그런데 기침을 자꾸 하는 애도 다섯 시에 태권도를 간대

내 동생도 집에 가서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저렇게 누워만 있어

 

우린 꽤 멀리 왔지? 그런데 다들 어디 갔니? 난 우리가 어딘가 당도(當到)하려는 줄 알았는데

 

뒤집혀진 장갑 속에서, 기름에 진 장화 속에서

나 알을 찾았어 축 늘어진 청포도, 청포도였어

「조합원」 부분

 

맥크리는 어렸을 적을 회고하며 “식기 시작한 것들은 미끄러웠”다고 말한다. 유년의 풍경을 이루는 것들, 이를테면 “할머니가 쏟은 가래, 도롱뇽 알, 갓난아이, 녹조 위로 떨어지는 햇볕, 개천으로 뛰어드는 친구들”의 “수온은 미지근했”다. 미지근한 유년의 풍경 주위로 “물이끼가 밟”혀 미끄러운 건 당연한 일. 심지어 “친구들을 따라 뛰어드는 나”마저도 “도롱뇽”처럼 미끄럽다. 그의 유년은 처음부터 식어가고 있었으며 자연스레 미끄러웠던 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식기 시작했길래 미끄러워졌다는 것일까. 시를 계속 읽어보자. “야광 잠바를 입은 친구가 신발 사러 엄마랑 백화점에” 가고 “기침을 자꾸 하는 애도 다섯 시에 태권도를 간”다. 우리 “꽤 멀리” 온 게 아니냐고 흥얼거리며 앞장섰던 화자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 “다들 어디 갔”는지 알 수조차 없다. “우리가 어딘가 당도(當到)하려는 줄 알았”던 화자의 기대는 깨진다. 심지어 화자가 기껏 찾은 알은 “축 늘어진 청포도”에 가깝다. 이미 식어버려 너무도 미끄러워진 것.

맥크리는 블랙워치에 몸담으며 정의라는 세상을 꿈꿨다. 그는 다른 동료들도 자신처럼 정의를 꿈꾸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자신을 가르쳤던 블랙워치의 수장 가브리엘 레예스는 탈론이라는 테러조직에 들어가버린다. 다른 요원들 역시 그를 따라 테러활동에 동참한다. 식어버려 미끄러워진 것은 정의를 향한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맥크리는 과거의 동료들과 적이 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려 한다.

이런 맥크리의 모습은 피터팬을 연상시킨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영영 어린아이로 남아 네버랜드를 지키려고 한다. 네버랜드는 아이들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원동력으로 하는 환상의 시공간이다. 거기서 아이들은 공평하고 공정하게 살아간다. 반면 현실은 어른들의 위선이 득실대는 세계다. 어른들은 현실의 규칙에 얽매여 매일매일을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상상력은 오래전에 이미 식어버렸다.

슬프게도 맥크리는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채 평생을 어린아이로 살 수 없다. 시간은 그에게 성장하기를 요구한다. 레예스나 다른 요원들처럼 네버랜드를 빠져나와 현실의 규칙들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 그건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합원」에서 보듯 이미 유년 시절 곳곳에서부터 네버랜드가 무너지리라는 징후는 도사리고 있었다. 유년은 미끄러웠고 유년을 둘러싼 네버랜드는 식고 말았다.

그럼에도 맥크리는 네버랜드를 지켜내려고 한다. 그는 유년의 친구들을 불러모아 “어느 날 바닷가 마을의 작은 민박집으로 여행을” 떠나 네버랜드의 추억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더는 할 얘기도 없고” “멀뚱멀뚱 서로의 상판만 보고 있”을 뿐이다. 순수했던 과거는 “더 이상 우리를 한 덩어리로 만들어주지 않고” “지난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게 만든다. “나는 부모한테 많이 맞았어”라며 누군가가 화제를 새롭게 꺼내며 공감대를 이끌어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더 이상 할 얘기가 딱히 없”다(「같은 과 친구들」). 네버랜드는 무너지고 말았다. 맥크리는 그런 사실이 서글프고 서글프다.

 

 

2. 잠깐 멈추시지

 

네버랜드의 잔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보며 맥크리는 한숨을 내쉰다. 이윽고 그는 네버랜드를 잊은 사람들에게 섬광탄을 터뜨려 그들을 멈춰 세우고는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쏜다. 탄환은 추억의 속도로 그들의 머리를 관통하며 네버랜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옷장 안에는 옷 대신 겨울 이불이 쌓여 있어. 나는 로켓이 불을 뿜길 기다리고 있지. 이불장이 마구 흔들리고 드디어 우주에 다다른 순간. 옷장 밖으로 이불이 다 쏟아진다. 이불을 마구잡이로 흩뜨려놓고 나는 그 밑으로 기어 다녀. 이불 밑에 내가 있고 내 밑에 이불이 있지. 이불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방 안 전체가 이불장이면 좋겠어. (…)

1월에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그해 여름까지 매일 밤 무서워서 대성통곡을 한다. 어차피 같이 죽을 텐데 옆에 사람이 있고 없고는 위로가 안 되고. 식음을 전폐한 채 삐쩍 말라가면서 나는 옷장 안에 숨어 있지. 옷장 안에는 세탁소에 갔다 온 옷들이 비닐도 벗지 않고 걸려 있어. 옷들이 전부 사람이면 좋겠다. 내 방이 옷장이고, 우리 집이 옷장이고, 우리 마을이 옷장이라면. 수만 명이 옷장에서 부둥켜안고. 나는 그중에서도 맨 구석에 숨어 있어. 귀신이 옷장을 열고 차례차례 죽이는 동안. 나는 제일 구석에서 내 차례를 기다릴 거야. 내 차례가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낮잠을 잔다. 세탁소 비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꿈을 꾸며 마지막에 죽는다.

「옷장」 부분

 

화자는 아이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빌려 옷장 속에서 “로켓이 불을 뿜”는 것을, “이불장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드디어 우주에 다다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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