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촛불과 광장의 한국현대사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수, 한국현대사.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 저서로 『대한민국사』(전4권) 『유신』 『역사와 책임』 『사법부』 등이 있음. hongkoo@skhu.ac.kr

 

 

촛불과 광장, 같고도 다른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가 실현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한국현대사에 새로운 장이 열렸고, 시민들은 자기 손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는 데 감격하고 있다. 맞다, 감격이 먼저다. 마냥 감격에만 젖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얼마 만의 승리인가. 특히 ‘헬조선’에서 ‘흙수저’ 처지로 살기를 거부하고 이런 엄청난 변화를 실현한 젊은 세대에게는 고맙다는 인사와 축하를 보내고 싶다. 노년층은 4·196·3으로, 장년층은 ‘서울의 봄’과 6월항쟁으로 자신의 청춘에서 한때나마 빛나는 순간을 경험했지만, 워낙 어려운 시대를 보내다보니 제 손으로 역사를 바꿔보고도 역사가 바뀐다는 사실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사십대 초반이나 삼십대 후반들도 2002년 선거에서 노무현의 승리에 열광했지만, 별로 세상을 바꾸지 못한 채 휙 5년이 지난 뒤 민주주의의 후퇴와 죽음 속에서 역사를 바꾼 기억을 묻어버렸다. 세상이 나빠지는 것만 겪어온 젊은 층이 제 손으로 역사를 바꾸고 느끼는 뿌듯함과 기쁨은 말해 무엇하랴.

흔히들 민주주의 하면 대의민주주의를 떠올리고,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장치로는 의회와 정당을 꼽는다. 어느 나라보다 빨리 절차적·제도적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는 평을 듣는 한국 현대정치사를 들여다보면 대의민주주의가 한국에서만 유별나게 오작동하는 것인지, 또는 대의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장치가 맞긴 한지 의심이 든다. 지난 삼사십년간 한국정치의 중심무대는 광장이었기 때문이다.

서너달 전만 하더라도 이백만이 넘는 인파가 광장을 메우고 박근혜의 퇴진을 요구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하는 법이다. 유신이 무너지던 1979년의 1학기에는 전국 주요 대학에서 한건의 데모도 없었고, 19876월항쟁이 있기 딱 5개월 전에는 실내에서 100명이 모이는 집회조차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민족민주운동진영이 위축되어 있었다. 태풍이야 그래도 닥치기 며칠 전에 알 수 있지만 우리 발밑을 흔드는 지진은 늘 이렇게 갑자기 오고야 만다.

왜 한국현대사에서는 광장에서 촛불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해온 것일까? 촛불이 켜져 있을 때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그 역사를 만드는 주체는 바로 당신과 나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촛불이 몇십년 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지금은 무수히 많던 촛불이 왜 세상을 별로 바꾸지 못하고 꺼져버렸는지 이야기해야 할 때다. 우리가 촛불을 켜고 광장을 메웠던 순간은 분명 역사의 전환기였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다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 이백만 시민을 광장으로 불러 모은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헬조선의 흙수저들이었다. 박근혜-최순실게이트가 폭로되는 실마리가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입학 사건이었는데, 이것은 흙수저라 불리는 젊은 세대에게 극히 민감한 문제였다. 흙수저들의 거센 분노가 이보다 앞서 표출된 사례로 20164월 치러진 20대 총선을 들 수 있다. 야당은 분열되었고 보수진영은 단일 대오로 선거에 임했으니 진보언론조차 선거는 해보나마나 새누리당의 압승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새누리당은 122석에 그쳐, 2004년 탄핵 직후 한나라당이 얻은 121석 수준의 놀라운 참패를 당했다. 다들 예상 밖의 결과라고 충격을 받았다지만, 이 총선이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또 있었을까? 역사라는 창고를 뒤져보면 꼭 같지는 않지만 없는 게 없이 다 있다. 약 40년 전인 19781210대 총선에서도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에서 1.1퍼센트 앞서는 대이변이 일어났다. 다들 선거결과에 놀라 자빠졌지만, 열달 뒤 정말 놀라 자빠질 일, 박정희가 머리에 총을 맞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사는 늘 그렇게 변해왔다.

헬조선 흙수저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노무현의 당선에 기뻐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선거운동 과정에서 했던 연설 내용을 기억할 것이다. 국민경선을 통해 이인제(仁濟) 대세론을 뒤엎고 후보에 선출된 노무현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조선 건국 이래 6백년 동안 우리는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며,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면서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선거유세 기간 중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부자 아버지를 만나지 않더라도 나라에서 보장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면 노무현이처럼 변호사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 사장도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나라”를 만들자고 강조했다. 부모의 권력과 재산, 사회적 계층, 학벌 같은 것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고, 우리는 진짜로 권력을 쟁취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아니 노무현을 뽑았던 사람들은 개혁에 실패했다. 부모의 권력과 재산, 사회적 계층, 학벌 같은 것이 대물림되는 사회, 노무현이, 노무현을 뽑은 우리들이 막아보려고 했던 사회가 이 땅에 굳건히 자리잡은 것이다.

의병에서 지금의 촛불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사를 바꾸어온 주역은 늘 십대 후반과 이십대였다. 4월혁명의 주역이 지금 어버이연합 세대가 됐고, 6월항쟁의 주역 386이 기득권 세대가 됐지만, 21세기 광장의 주인들은 흙수저 세대로 남아 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서 진화와 좌절을 함께 경험한 세대, 그들이 다시 판을 벌였다.

그런데 광장이라는 넓디넓은 공간은 늘 거기 있었고, 시민들은 전문가들도 기억이 헷갈릴 만큼 자주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바뀐 것도 아니고 안 바뀐 것도 아니면서 세월은, 역사는 정신없이 흘러왔다. 촛불과 광장의 역사를 되짚어보자.

 

 

유신시대: 광장만 있고 민주주의는 없는

 

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여의도에 5·16광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무려 12만평, 넓이로 치면 세계 최대의 광장이었다. 1971년 준공된 그곳에서는 우리가 지금 ‘광장’이라는 말을 쓸 때 가득 담겨 있는 민주주의와 소통이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군중을 동원하여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북괴군, 이룩하자 유신과업” 따위의 구호를 외쳐대고, 군사퍼레이드나 하는 곳이었다. 유신시대에 국가의 광장은 있었지만 시민의 광장은 없었다.

60년대와는 달리 유신시대에는 학생들이 거리에서 데모도 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교내시위라는 말이 등장했다. 60년대의 데모는 교내에서 성토대회나 시국토론회 같은 집회를 열고, 교내를 두어바퀴 돌며 몸을 푼 뒤 학교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시위를 하는 방식이었다. 데모는 으레 가두시위였지만, 유신 이후 경찰은 아예 교문을 봉쇄했고, 서울대는 학교를 시내 중심가에서 관악산 산속으로 옮겨버렸다. 서울대의 경우, 강의실 밀집한 곳에서 교문까지 십분, 교문을 돌파한다 해도 민가를 만나려면 또 십분쯤 가야 하니 자연 교내시위가 되었다.

하도 탄압이 심하다보니 1978년에는 각 대학의 학생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광화문에서 연합시위를 거행했다. 이마저 정보가 새어나가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이때 광화문 차도를 밟았다가 잡혀간 사람들은 대개 징역 1년 이상을 선고받았다. 그 광화문에 이제는 백만이 넘게 모여 대통령 물러가라 한 것을 보면 역사가 기가 막히게 변한 것이고, 그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인 것을 보면 역사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19781210대 총선 결과에서 민심이 유신체제를 떠났다는 것은 분명해졌지만, 19791학기 전국 주요대학에서는 교내시위조차 한건 없었다. ‘짭새’가 도처에 앉아 있고, 닭장차가 곳곳에 서 있었다. 그때는 데모할 때 주동자가 뛰쳐나와 ‘학우여!’를 외쳤는데 ‘학’ 하다가 붙잡혀가는 웃지 못할 일도 왕왕 있었다. YH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들어간 것이 89일, 10대 총선 이후 첫 정치적 농성이었지만, 석달도 안 돼 유신체제가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5월에서 6월로

 

김재규(載圭)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목을 걸고 최태민(崔太敏)을 고발한 것으로도 재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수천수만 젊은이들이 피 흘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친형제와도 같은 박정희를 쏘았지만, 결국은 유혈사태를 막지 못했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여 광주에서 엄청난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온순하고 반공적이었던 평범한 시민들이 무기고를 깨고 총을 들어 계엄군을 몰아내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비극으로 끝났지만, 다만 며칠간이었지만, 광주는 그야말로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절대공동체’였다. 그 공동체의 중심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이었다. 민주주의의 학교요, 성숙한 시민들의 만남의 장이었던 도청 앞 광장에 매일 3만명의 시민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렇지만 계엄군의 진압이 확실해진 526일 밤, 광장은 비어가기 시작했다. 1퍼센트, 300여명이 남았다고 한다. 3만명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전두환이 아무리 흉악하다 할지라도 탱크 몰고 들어오지는 못했을 텐데……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결국은 거의 다 집으로 돌아갔다. 전두환에게 텅 빈 도청을 내줄 수 없다고 생각한 ‘바보 같은’ 사람들만 거기 남았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처절하고 참담한, 그러나 장엄한 패배로 광주의 저항은 끝이 났다.

그날 밤 집으로 간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겨나 다른 사람들에게 급속히 전염된 80년대의 몹쓸 병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겁먹고 흩어졌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떨쳐버릴 수 없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