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나무늘보의 치열함

 

 

김성중 金成重

1975년 서울 출생.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개그맨』 『국경시장』 『에디 혹은 애슐리』, 중편소설 『이슬라』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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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머리가 생겼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래서 얻게 된 취미가 있는데 일에 하중을 받으면 책상에 거울을 올려놓고 흰머리를 찾아 뽑는 것이다. 이 행위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그 결과 머리를 쓰는 대신 머리를 뽑는 한심한 작태를 연출하게 되는 것이다. 이장욱 작가의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녹취를 풀면서, 폭염 속에 원고를 붙들고 있으면서, 나는 부지런히 흰머리를 뽑았다. 모름지기 흰머리란 히드라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의 목을 벤 자리에 세개의 머리가 돋아나는…… 사실, 내 머릿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장욱이 네번째 소설집 『트로츠키와 야생란』(창비 2022)을 출간했다. 발표할 때마다 그때그때 읽은 단편도 많지만 책 한권을 천천히 통과하는 동안 난관에 봉착했다. 독자로서는 즐겁게만 읽어온 그의 소설이, 인터뷰를 앞두고 질문을 추출해내며 읽으려니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이장욱의 소설은 술술 잘 읽히지만 ‘감춰진 중심부’를 찾다보면 히드라처럼 질문의 연쇄다발을 몰고 온다. 그리고 질문은 끝이 나지 않는다. 결론 나지 않은 채 생각의 공회전이 이어진다. 아얏, 실수로 검은 머리를 뽑고 말았다.

희한한 것은 그다음인데 소설을 읽고 나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채로도 불만족스럽지 않다. 다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뭔가를 전달받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 묘한 감상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오래전 술자리 말석에서 건배한 것을 제외하면 이야기를 길게 나눠본 적이 없으니 이번이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읽어도, 힘껏 당겨 읽어도, 어느 쪽으로든 탄성이 좋아 쭉쭉 늘어나는 이야기 주머니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이냐고.

 

약력부터 되짚어보다 새삼 놀랐다. 늘 소설가 선배로만 생각하다가 시집과 이론서를 합쳐보니 1994년에 시로 등단해 첫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을 낸 2002년부터 올해까지, 이십년간 공백 없이 열네권의 책을 출간했다. 다섯권의 시집, 네권의 소설집, 세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산문집과 문학론집(집이 대체 몇채야!). 등단 십년이 넘은 시인이었던 그가 단편도 아닌 장편(『칼로의 유쾌한 악마들』, 문학수첩 2005)으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후로부터는 줄곧 ‘시의 시기’나 ‘소설의 시기’를 따로 두지 않고 작업을 병행했다. 이 부지런한 행보에 대해 묻자 “게을러서 그렇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게으른 인간이라 다른 것을 해볼 궁리를 도통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이장욱은 달변에 다변이다. 눌변에 말수가 적을 것 같은 인상이지만 천만의 말씀. 질문의 논지를 파악하고 개념을 명확히 해둔 다음, 그러니까 사유의 진지를 제대로 구축한 다음 그 바탕 위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펼쳐놓는다. 연구자로 오래 공부한 탓도 있지만 꼼꼼하고 논리적인 성격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았다. 덕분에 제구력이 엉망인 투수가 장황한 질문의 공을 던져도 그는 두툼한 글러브를 끼고 여유있게 받아주었다. 입에서 나온 말을 그대로 받아 적어도 별다른 오류 없이 완벽한 문장이 되는 사람이 드물게 있는데, 그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두개의 주머니

 

아마도 그는 시와 소설을 함께 쓰는 창작에 관한 질문을 숱하게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처럼 주머니가 소설 하나인 사람은 반짝이는 비늘을 얻으면 즉시 그 주머니에 넣어두고 문장으로 출력할 궁리를 한다. 그런데 주머니가 두개인 사람은? 어디에 무엇을 넣을지 저절로 분화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저 주머니로 옮겨 담는 경우도 있을까? 심지어 그는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을 각각 발표한 적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하나의 영감에서 촉발된 시-소설 ‘쌍둥이’를 품고 있던 것일까? 상상할수록 너무나 신기하다.

 

시와 소설은 직관적으로 구분해 다른 ‘주머니’에 넣어두기는 합니다. 그런 건 별로 헷갈리지 않아요. 헷갈려도 큰 문제가 없기도 하고요. 주머니는 여럿일수록, 뒤섞일수록 좋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같은 제목의 시와 소설을 발표한 경우에도 그 둘을 쌍둥이라고 친다면 일란성보다는 이란성에 가까울 겁니다. 제목만 똑같지 완전히 별개인 작품이니까. 가령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예전에 그런 제목으로 시를 썼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소설을 써서 발표한 뒤, 나중에야 생각나더군요.

 

시인으로 살던 그가 갑자기 소설로 또 등단한 배경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시절부터 줄곧 시와 소설을 함께 써왔고, 시집을 낸 이후에도 틈틈이 소설을 써서 투고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라는 표현매체를 가지고 있음에도 소설을 계속 쓴 이유는 무엇일까?

 

시로는 소화할 수 없는 소설적 욕망이 있으니까요. 소설은 시와는 종류가 다른 피드백을 줘요. 초창기에는 ‘시적인 소설은 안 쓸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의식적으로 서사를 강화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런지, 몸에 배어서 그런지 장르 차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아요. 저한테 소설은 끊임없이 ‘타인 되기’ ‘어떤 맥락이나 상황 속의 인간 되기’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을 재구성해보는 장’과 같아요. 소설을 쓰다보면 나와는 다른 존재를 자꾸 불러내게 되는데, 그 부분이 저를 자유롭게 만들어줍니다.

 

이장욱은 소설 쓰기에 대해 ‘자신을 타자화시킨다’는 말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는 서술자의 객관적 지위를 기질적으로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위치 자체를 의심한다. 어쩌면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가장 거리가 먼 타입이 아닐까. ‘전지적’인 부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발화자를 세우고, 문제적 인물에게도 다채로운 해석의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이런 기질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서술자의 전능함을 부정하는 기질이 이장욱의 작품을 더욱 ‘소설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면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소설을 쓴다

 

모든 소설은 저마다의 미스터리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이장욱의 소설에도 역시 어딘가 윤곽이 분명치 않은 공란들이 나온다. 정확히 무엇이 비었는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인지 뭔가가 있다가 사라진 자리인지 모호하지만 비어 있는 느낌. 재미있게도 그의 시집을 한권 읽고 소설로 돌아와 재독을 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더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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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설집의 두번째 수록작 「귀 이야기」를 일독한 후에 연필로 적어놓은 내 메모는 이러했다.

 

—너무나 부드럽고 아름답고 웃기고 재미있는 소설이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 채로도 전달받는 ‘감정’이 있다.

 

잠수부의 귀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단편은 ‘나’와 ‘친척’ ‘예수’(친구의 이름이다), 이렇게 세 사람이 강원도에 여행을 다녀오는 이야기다. 셋의 대화는 따로국밥일 수밖에 없는데 친척은 귀가 잘 들리지 않고, 예수는 남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자기 말만 지껄여대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물들은 불만족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말은 안 통하는데 마음이 다른 방식으로 통한다고 할까, 헛소리가 난무해도 각자 알아서 헤아린다고 할까. 친척이 귀에서 나무가 자란다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하지만 귓속에서 누가 중얼거리는 기분이라면 나도 좀 안다. 그럴 때는 숨을 가만히 참고 눈을 가만히 감고 한참 시간을 보내야 한다”(65면)라고 받아들이는 식이다. 이야기 말미에 이르러 잠든 친척의 귀에서 진짜로 작은 나무가 밖으로 나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다지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 여행이 끝날 때쯤이면 ‘나’도 독자들도 ‘부조화로 이루어진 조화’ 속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시든 소설이든 예전부터 ‘모호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어요. 쓰는 저는 사실 정확한 지점을 포착하려고 애쓴 결과인데요. 소설가가 대개 비슷할 텐데, 저 역시 스스로는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해요. 가장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것을 글로 쓴다는 의미에서요. 귀에서 나무가 자라는 장면 같은 것은 그런 감각의 부수물에 가까울 듯하고요. 인간이든 세계든 우리가 명료하게 규정하려 할수록 누락되거나 빠져나가는 부분이 생기잖아요. 그런 그림자 부분에 예민해야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또다른 리얼리스트로서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스스로를 ‘당연히’ 사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재미있었다. 세계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과정에 환상이라는 우회로, 혹은 고속도로를 탄다 해도 도착지는 변함없이 현실일 테니까. 우리는 리얼리스트의 욕망으로 환상을 집어오고 있다. 이장욱 소설의 불투명한 모호함 역시 현실에서 기인하다. 그리고 이 모호함에는 ‘인간이나 세상은 모호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모종의 ‘앎’이 들어 있어 불가지론과는 거리가 멀다.

 

 

세기를 가로질러

 

「트로츠키와 야생란」의 경우, 아마도 문체가 이야기보다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낭만적이고 도취적이며 허약하고 사변적인 이 목소리는 내성적인 십대 소년의 우수나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대학시절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 이 상상에 맞는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는 20세기에 출발해 21세기가 되어서야 작가에게 도착했을 것이다. 세기말의 정서를 품고 출발해 세기 초의 파국 속으로 날아온 오래된 이야기. 이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체다.

 

여비를 아끼고 아껴 드디어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런 것을 하려고 했다. 사생활과 오후와 음악만으로 살아가기. 관념과 세계사와 사후세계를 버리기. 성별과 이름과 가족계획을 망각하기. 우리가 사랑하며 함께 머물렀던 도시를 홀로 찾아와 헤매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기.

친구여, 나는 그 미래에 도착하고 말았다. 우리가 상상하지 않으려 했던 바로 그 미래에.(75면)

 

주인공 ‘나’는 여러모로 19세기적인 인물이다. 분노, 원한감정, 복수심에 사로잡혀 비열한 인간을 살해한 후 달아난 상태라는 점, 그의 친구이자 연인이 배신당한 운동가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그것이 좋았다. 그것이 좋았지”(76면) 열에 들뜬 목소리로 두번씩 말하는 버릇. 한번은 멀리 있는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이에게, 다른 한번은 나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이 말버릇이 와들와들 떨리는 몸처럼 글 속에 진동을 일으킨다.

관광을 가장한 도피여행에서 ‘나’는 트로츠키와 그의 아내 류다를 만나고, 그 이름은 살해당한 혁명가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바이깔호수 한복판에서 관광객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트로츠키 부부의 삶은 여러 갈래로 중첩되고 불어난다. 이야기는 미시적이지만 다루는 세계는 훨씬 거시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자신이 공격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 뉴스를 접한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당장 출발할 수 있는 방법은 얼어붙은 호수를 ‘걸어서’ 건너가는 것뿐이다. 앞서 걷는 무리를 발견한 나는 재빨리 뒤를 따라가지만 이내 완벽한 어둠 속에서 고립된다. 생존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순간 뜻밖에도 야생란 향기가 난다. 출발 전 그는 류다가 준 야생란 차를 마신 상태였다(이 차는 조금 복용하면 약이 되지만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파르마콘’처럼 여러모로 수상쩍다. 혁명가가 부업으로 마리화나를 키운다면 이상한 듯 보이지만 류다가 야생란을 키우는 것은 맥락상 어울리는 느낌도 든다). 그러자 이 단단한 얼음을 뚫고 식물들이 피어오른다.

 

이 얼어붙은 호수에서는 식물이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환각이나 착란이 아니라 실재하는 강렬한 대립물이 필요한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혁명이 역사의 중력이라면 야생란은 거기서 피어오르는 또다른 세계의 이미지일 수 있겠죠. 이 소설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문체와, 얼어붙은 바이깔호수를 걸어서 나가는 장면은 각각 따로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설로 합쳐진 거예요.

 

소설 속에서 레온 뜨로쯔끼(Leon Trotsky)와 관광객을 상대로 돈을 버는 트로츠키, 테러를 가하고 도망쳐온 주인공과 암살자, 신념이 무너진 현실에서 식물로 관심사를 옮긴 류다와 한국에 두고 온 ‘나’의 ‘친구’의 삶들이 다양한 유비관계를 이룬다. 그들 사이에 펼쳐진 바이깔호수는 나와 너의 경계 같기도 하고, 세기를 가로지르는 도정을 품고 있는 공간인 듯 보이기도 한다. 어둠과 얼음의 공포, 그것을 뚫고 올라오는 식물의 이미지는 역동적이고 압도적이다.

이번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두고 ‘비관주의자의 낙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자 그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모두를 경계하는 편”이라면서 조금 더 정교하게 세계를 바라보는 입장을 들려주었다.

 

글쎄요, 꼭 염세적이지는 않은 듯해요. 「노보 아모르」나 「코끼리 고구마 그리고 오조의 발목을 잡은 손들」의 마지막 장면은 나름대로는 모종의 밝은 느낌이 배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도 두 인물이 만나면서 끝나고요. 그래봐야 낙관적인 건 아니지만요. 개인적으로 저는 염세와 구원의 서사를 둘 다 경계하는 편이에요. 인간에게 ‘해방’이나 ‘구원’의 시간이 온다고 믿지 않아요. 거기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무한한 노력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지구는 지속되겠죠. 구원이나 종말, 이런 유사종교적 용어들은 동전의 양면이고 궁극적으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소설은 염세적 종말론이나 낙관적 구원의 서사, 양쪽을 모두 거절하는 장르에 가까워요.

 

 

용해되지 않는 리듬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세계에 대한 관심을 놓은 적은 없으나 주체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한다는 느낌이 든다. 심오하고 끈질긴 자기의심이랄까. 소설 속에서도 객관적 서술자 대신 고유한 목소리를 갖고 있는 화자들이 등장한다. 덕분에 이장욱의 소설은 생기있고 다양한 목소리들로 넘쳐난다. 중층적으로 쌓이는 다성의 목소리, 비약과 도약이 심한데도 끝까지 듣게 되는 궤변, 외로운 자의 중얼거림과 속엣말, 속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이어서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말투. 이 무수한 목소리의 바리케이드 뒤에서 작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단편이 「●●」이다. 디제잉하듯 인물의 목소리로만 이어지는 이 작품은 제목부터 어떻게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어쩌면 이 소설의 진정한 디제이는 까만 고양이일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지나가는 동선에서 자살하려던 여자, 논쟁 중인 커플, 편의점 앞에서 혼잣말하는 아저씨, 부동산 아저씨, 젊은 순경 등등 다채로운 인물들의 말밥이 고명처럼 올라가니 말이다. 고양이 한마리가 쓱 지나갔을 뿐인데 이 낚시에 걸려든 여러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독자들은 이들의 세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섞여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라는 제목조차도 쩜쩜인지, 뿅뿅인지, 땡땡인지, 고양이 발자국인지 정해져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읽는 사람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된다. 고양이의 이름을 제각각 다르게 부르던 소설 속 사람들처럼.

 

「●●」의 경우 이질적인 인물이 연달아 나와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런 흐름을 조화롭게 C코드에서 D코드로,라는 식으로 넘어가면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에요. 전혀 다른 세계가 공존하면서 생겨나는 거리감과 불협화음 같은 것들이 소설에서는 리듬을 이루는 것 같아요. 나아가 리듬끼리 만났을 때 부딪치는 순간들, 서로 스며들지 않고 따로 남아 발생하는 소음들, 소설에서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소설을 쓰다보면 다양한 코드를 하나로 수렴시키지 못하는 지점이 있는데, 애써 정합적으로 만들지 않고 그 자체로 다루는 것이 세상의 실체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메모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이 되는 말이다. 이 세상의 리듬이 그렇게 매끈할 리가 없으니까. 소설은 지루한 부분을 뺀 삶이고, 소설의 리듬은 세상의 리듬과 흡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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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은 개체나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대개 바깥에서 오잖아요. 외부에 반응하며 발생하는 것이죠.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나의 리듬과 너의 리듬, 나와 세상의 리듬이 충돌하며 벌어지는 간극들이에요.

비슷한 맥락에서, 세계가 하나의 리듬으로 획일화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경계해요. 니체는 긍정적으로 서술했지만 디오니소스도 그렇죠. 차이의 소멸이 황홀경을 불러오겠지만 거기에는 주체도 없고 개체도 없어요. 사실 거기에 닿는 건 의외로 쉬울지도 몰라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거나 종교적 광신에 도달하면 가능할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디오니소스적 리듬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해요. 거대한 리듬에 용해되어버리니까. 그와는 다른 ‘소설의 리듬’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 소설은 확실히 근대적 장르인 거죠.

 

이 말을 듣는 순간 한 무리의 인물들이 번쩍하고 떠오른다. 자기 세계에 몰두하는 아웃사이더 괴짜들. 소설집에서만 찾아도 거의 한 세트는 될 법한 인물들. 변희봉, 하루오, 정귀보, 복화술사…… 『고백의 제왕』(창비 2010)의 주인공은 모두가 고백조로 동조하니까 튕겨져 나가버리기는 했으나…… 전부 ‘튀는 리듬’을 가진 자들이었다! 말하는 것도 이상하고 살아가는 리듬 또한 주변과 엇박을 내면서 따로 노는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이장욱의 소설에서 강력한 활력감을 주지 않는가. ‘리듬’이라는 개념 하나로 그의 세계관을 살짝 엿본 순간, “‘리듬’을 타지 않으면 시도 소설도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친애하는 적

 

문학 외에 도파민을 얻는 분야를 묻자 ‘철학서나 이론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설 쓰기에는 도움이 안 되고 방해가 될 때가 더 많지만, 감성이나 감각도 논리나 이성에 비추어 자꾸 타자화하고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좋아하는 철학자가 누구냐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철학자야 많죠. 스피노자, 레비나스, 바흐찐…… 최근에는 히토 슈타이얼의 미학도 흥미로웠고요. 정신적으로 애증을 느끼고 싸우게 되는 철학자가 있는데 지젝이 그랬어요. 그가 급진적인 레닌주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가 그의 비판 대상인 ‘리버럴’이나 ‘사민주의’ 스탠스에 가깝기도 해서 그렇겠죠. 한때는 지젝의 ‘철학적 히스테리’를 논쟁적으로 읽는 게 낙이었어요. 제 사유를 단련하거나 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동시대를 같이 살아간다는 게 고마운 철학자였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거예요.

비슷하면서도 반대의 포지션으로 우엘벡을 들 수 있어요. 저하고는 다른 급진적 감각과 극우파적 세계관이 재밌어요. 그러니까 제게 흥미를 일으키는 사람은 저와 비슷한 타입이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 적들, 매력적인 적들이 아닐까 싶어요. 왼쪽의 지젝과 오른쪽의 우엘벡은 흥미로운 급진주의자들인데, 왠지 벌써 구시대 사람들 얘기하는 느낌이……

 

이렇게 말하는 이장욱이야말로 흥미롭지 않은가? 좋아하는 철학자를 묻는 질문에 ‘나의 친애하는 적’으로 답하다니 말이다. 말하자면 파랑인 자신으로서는 민트나 네이비보다 오렌지 계열의, 보색이 되는 텍스트가 좀더 구미에 당긴다는 뜻이리라. 게다가 (내 생각이지만) 지젝 타입과 우엘벡 타입, 둘 다 이장욱 소설 안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유명한 정희」를 보자. 청와대 앞에서 분신하여 죽음을 맞을 정도로 참담한 우익으로 변한 정희의 인생행로를 보면서 주인공 ‘나’가 느끼는 기묘한 감정은 간단치가 않다. 어렸을 때 자신이 걸어놓은 주문이, ‘너는 망령이 들 거야’라고 말한 것이 실제로 이루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경정신과 의사로 중산층의 ‘리듬’에 흡수되어 살아온 ‘나’ 역시 사실상 ‘유령’처럼 되어 있음을 독자인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망령과 유령이 된 두 소년이 거울처럼 마주보는, 어둡고 슬픈 이야기다.

「잠수종과 독」에서도 실패한 인생 끝에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투신하는 ‘김정식’이라는 인물이 문제적으로 제시된다. 사건이 일으킨 연쇄적인 도미노 끝에 연인을 잃은 주인공 ‘공’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죽지 않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이고 싶어서다. 그럼에도 그 역시 김정식을 앞에 두고 쉽사리 비판하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소설은 ‘파고드는’ 장르다. 겉으로 봐서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삶이나 선택에 대해 안으로 파고들어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캐내오는 것. 그래서 좋은 소설은 모두 두겹의 이야기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장욱은 인간의 심연이라는 구덩이에 접근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구덩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파헤치기보다 우두커니 응시하는 느낌이랄까. 구덩이에 들어가지 않고도 구덩이 너머까지 들여다보는 이미지가 떠올랐다고 말하자 그는 가볍게 반박했다.

 

왜요, 저도 들어가죠. 구덩이에.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덧붙였다.

 

그 구덩이 안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구덩이를 바라보고 객관화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소설을 쓰려고 구덩이를 바라보면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이죠. 바라보는 대상 속에 자신이 이미 연루돼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아름다운 영혼’이 될 수 없어요. 단정을 하기도 어렵고 도식화도 어렵죠. 외부세계를 한탄하면서 관조하는 ‘아름다운 영혼’은 그의 한탄과 관조 자체가 이 세계의 보존에 기여한다는 것을 모르잖아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조건을 민감하게 느끼지 않으면 소설을 쓰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가령 「유명한 정희」는 우리 현대사에 연루된 인물로 정희를 그리고 있지만, 실은 정희를 그리는 화자 역시 정희에게 무한하게 연루돼버려요.

 

 

빠레또의 법칙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이 다가와 가벼운 질문을 던져보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이기에 물어본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뭔가를 했는데 작업량이 너무 적어요. 이걸 어쩌면 좋죠?”라고 얼빠진 목소리로 묻는 삼십대의 만학도가 있다면 무슨 말을 들려주겠느냐고.

 

저도 똑같다고 말해줄 겁니다.

 

단번에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서 ‘빠레또의 법칙’에 대해 맹렬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빠레또의 법칙이란 원인의 20퍼센트가 결과의 80퍼센트를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100명이 일하는 어떤 공장의 생산량이 100이면 20명이 80의 일을 하고, 80명은 합쳐서 20만 일한다는 뜻이 된다. 이 법칙의 핵심은 20이 있기 위해서 ‘80의 잉여’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 현상에 개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20퍼센트만 일을 하고 80퍼센트는 일하는 척 놀고 있다고 한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노는 개미 가운데 열마리를 따로 떼어두면 다시 두마리의 개미만 일을 하더라는 것이다.

대체 그 두마리는 무슨 운명의 장난에 휘말려 ‘놀개미’로 살다가 ‘일개미’로 전락한 것일까?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왜 한마리가 아니고 두마리일까? 하긴 한마리만 일하면 그건 너무나 가혹한 저주…… 이런 생각의 곁가지가 실타래처럼 풀려나가는 동안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저는 이 법칙이 작가의 작업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한시간 글을 쓰려면 적어도 다섯시간은 놀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낭비한 시간이 쓸데없지만은 않아요. 꼭 있어야만 하는 시간이에요. 검색하면서 책도 보고 물구나무도 서고……

 

물구나무?

 

이건 아닌가? 아무튼 창작을 할 때 유의미한 시간의 몇배로 무의미한 잉여 짓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겁니다. 다만 저의 목표는 ‘다섯시간 놀았으면 제발 한시간만이라도 글을 쓰자’인데, 잘 안 되더라고요. 도대체 다섯시간 놀고 나서 십분 동안 두 문장을 쓰고 노트북을 접는 게 말이 되느냐, 이렇게 자책하는 나날이 요즘 근황이어서 그런 질문을 하는 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이지 큰 위로를 받았다. 삼십대의 만학도로 위장했지만 사실은 내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을 열네권이나 낸 선배조차 자책의 삽을 파고 있다니, 부쩍 인간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한동안 사흘 내내 여섯시간씩 앉아 있었는데 하나도 못했다는 둥, 그래놓고 배고파서 일어나야 하면 자괴감이 든다는 둥 작가들의 해묵은 타령을 즐겁게 주고받았다.

나는 인터뷰 내내 이장욱의 해박함과 성실성,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단련하는 태도에 감탄하면서 ‘역시, 성골이었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신라 골품제도에 빗대어 하는 우스갯소리지만,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자기 재능에 대한 몰두’가 창작자를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평소에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잘해봐야 육두품인 나는 내내 그에게 부러움을 느꼈는데 그조차도 같은 고충을 감당하고 있다니 역시 소설 쓰기란 소설가에게도 벅찬 노동이구나 싶었다. 인터뷰를 마친 우리는 출판사 앞 중국집에 가서 칭따오에 연태고량주를 타 먹으며 노동의 이모저모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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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원고를 쓰면서 되짚어보니 다섯시간 놀고 한시간을 일하지 못한다는 그가 어떻게 그 많은 책들을 쓸 수 있었는지 의구심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는 초고도 느리게 쓰고, 쓰고 나서 퇴고를 하는 데도 시간을 많이 소요하는 편이라고 했다. 그러면 도대체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로 학교 일 하는 데 드는 시간 빼고 읽고 쓰기만 하는 건가? 갑자기 육두품은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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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해 전 큰맘 먹고 가족들과 꼬스따리까에 여행을 다녀왔다. 국토의 4분의 1이 국립공원인 이 나라는 숲과 야생동물 천국이어서 온갖 동식물을 눈에 담아왔다. 빨간눈개구리도 보고, 파랑나비도 보고, 화려한 꽁지깃을 가진 귀한 께짤도 보았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인 동물은 나무늘보였다. ‘늘보’ 한마리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이 발견되면 관광객들이 단체로 위를 올려다보며 자동으로 정지동작이 된다. 누군가 쌍안경을 꺼내 옆 사람에게 빌려주기도 하는 등 일제히 그 경이로운 느림뱅이를 경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재밌던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나무늘보가 정말이지 느리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들 전위예술가의 퍼포먼스라도 되는 양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늘보를 보던 오후가 떠올랐다. 어딘가 닮았기 때문일까. 이장욱야말로 문학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집요하게 매달리면서 자기만의 리듬을 고수하고 있지 않은가. 나무늘보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리듬으로 살아가듯이 그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이질성을 유지하며 문학의 길을 가고 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부하며, 친애하는 적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누구보다 낯선 타자가 되어 이야기를 천천히, 공들여 짓는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누구보다도 완강하게 자기의 리듬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다섯시간 앉아 있으면서 두어 문장밖에 얻지 못한다 해도.

나무늘보처럼.

나무늘보처럼 치열하게.

 

그날 이십분간 꼼짝 않던 나무늘보는 마침내 나무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머지않아 우리는 이장욱의 열다섯번째 책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나무늘보는…… 생각보다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