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민중운동의 시민화, 시민운동의 급진화가 필요하다

지난호 하승창·한기욱 대담에서 민중운동·시민운동 양자를 뛰어넘는, 또는 통합하는 사회운동의 기획과 성찰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되었다.100% 공감한다. 현재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은 깊고 넓은 성찰이 필요하며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낙관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연대해야 한다. 지금의 세계와 한국사회의 현실은 민중운동, 시민운동, 진보정당운동 등이 각기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대응이 어려운 지경이다.‘같이 또 따로’ 행동하더라도, 한국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위해 어깨를 걸고 나아가야 한다. 대담에서 지적한 것처럼 적어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미국화)의 광포한 모순에는 공동 대응이 절실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성찰은 운동이 ‘가장 비참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보편적 사회정의와 인간성 실현’을 위해 싸운다는 기본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이 시대를 사는 보통의 민중(시민)에게 감동과 희망이 되고 설득력이 있는지’에서 시작해야 한다.이러한 성찰없이는 우리 사회운동은 총체적 사회변혁의 전망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운동이, 시작하는 과정에서의 새로운 고민과 (민중운동과의) 차별화, 성장 과정에서의 ‘모호함’(계급적·계층적·이념적 지향을 뚜렷이 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시민들과의 소통을 넓혀가는 방식)의 필요성 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사회의 근본모순과의 투쟁에서, 소외된 계급·계층에 대한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인 연대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정적으로야 그러지 않았겠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민중운동은 보통 시민과의 일정한 괴리와 ‘감동의 부재’에 직면해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현재 전통적인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재야민중운동·민족민주운동·학생운동·노동운동이(예전만한 지지를 못 받고 있는 현실이 매우 뼈아프다) 여전히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며, 또 한편에서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양날개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존의 사회변혁운동의 전투적 실천은 여전히 중요한데, 이는 아직도 분단과 자본의 모순이 첨예하게 민중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민이 피부로 느끼는 문제나 일상적으로 관심있는 사안에 참여할 수 있는 수준의 운동으로서의 시민사회운동 역시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 둘이 서로 연대하고 채워줌으로써 사회의 온전하고도 총체적인 변화와 진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민중운동은 시민운동의 ‘피부로 와닿는 문제제기 및 활발한 시민참여형 운동’에서 배울 점이 있을 것이며,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이 제기하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근본적인 모순에 대한 치열한 변혁투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의 긍정적 변화와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민주화의 성과와 경제적 자유화의 재앙’이 공존하는 모순과, 분단과 미국으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은 대단히 심각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형제애가 너무나 절실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대담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현재 전체 사회운동은 분단체제와 전쟁위기 극복을 위해 입체적인 행동에 나서야 할 때이다. 더욱이 부시가 재선된 마당에 한반도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절체절명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대담에서 제일 아쉬운 것은 ‘언론개혁문제’가 빠진 것이다. 민중운동, 시민운동 모두를 국민으로부터 고립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왜곡과 거짓보도를 일삼고 있는 족벌언론(조선·중앙·동아일보)에 대한 공동 대응 역시 매우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민중운동은 시민적 이슈와도 더 활발히 만나야 하고 다수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한 깊은 고민이 절실하며, 시민운동은 현재 수준을 뛰어넘어 민중적 이슈와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동시에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급진적’ 문제제기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 통한 사회운동간의 연대의 강화와 일상화, 연대의 질의 제고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여연대 시민참여팀장 안진걸 ahn@pspd.org

 

창비 특집을 읽고

아마 1989년이었던 것 같다. 어느날, 야학을 하던 한 선배가 술이나 한잔하자며 자취방을 찾아왔다. 그때 나눈 대화 가운데 한가지가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다.‘피티통전’(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이라는 말이었다.‘피티통전’이라니? ‘통일전선’이란 다양한 계급·계층간의 계급동맹으로 알고 있던 내게 이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하고, 바로 거기에 노동조합운동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내 나름의 결론도 갖게 됐다. 김종엽의 「노동운동의 성숙을 위해」를 잘 읽었다. 노동조합운동의 현실을 균형감있게 분석하며 진지한 대안을 제안하고 있어서다. 내 독해가 정확하다면, 이 글의 핵심은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과 ‘노동자 내부의 격차 확대’, 그리고 ‘피티통전’이란 취지와 그리 멀지 않다.

그는 “연대란 단순한 동류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어떤 사회적 빚을 지고 있다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도덕적 의무감”이고,“정규직의 상대적 고임금과 비정규직의 저임금은 동전의 양면”인데 “이 양면을 결합하게 하는 동력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자본으로부터 나오며, 그 격차를 줄이는 자원 또한 자본으로부터 나와야 마땅 (…) 하지만 그것을 압박하고 요구할 수 있는 힘은 정규직의 연대감 없이는 불가능하다”(30면)고 주장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분석하며, 대기업 정규직들이 이런 연대감을 회복하기 위해선 ‘친노동자 세력의 국회 진출’ 이상을 의미하는 정치를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대목은 매우 섬세하기까지 하다.“다소 임금 삭감을 각오하더라도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게 얻어진 시간은 아내의 사회생활과 노동을 보조하는 가사노동에 할애하는 한편, 사회화된 노동, 예컨대 지역사회 활동이나 노조활동 그리고 NGO 활동에 투여하는 것”(32면)이라고 한다. 그는 이를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영향력–정치화’ 노선이라고 부른다. 이는 “노동운동이 오랫동안 상실해온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복원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이념적 하향평준화를 겪으며 경제주의에 갇혀온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적 성격을 회복”(29면)하는 것이다. 그 첫걸음을 그는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인상 요구를 극도로 자제하고 비정규직이나 사내 하청기업 노동자의 처우개선 같은 쟁점에 집중”(30면)하는 데서찾는다. 필자의 논지에 비춰보면, 여기에 ‘일부 노동조건의 양보를 감수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덧붙여질 것이다.

이 부분에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정규직의 전략적 양보’ 항목에 임금 이외의 다른 무엇이 포함되는가 하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임금은 일정기간 동안 양보할 수 있다 치더라도, 정부와 자본이 요구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고용의 유연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고용안정 및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산별노조화에 대한 보장 등을 선결조건으로 내걸지 않고 (…)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다시 한번 덫으로 작용할 위험이 크다”(28~9면)고 강조하고 있는 것에 비춰볼 때 ‘포함되지 않는다’는 답을 끌어낼 수 있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정규직 과보호론’은 전략적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 참주선동 내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판단하고 있다. 적어도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려면, 그의 말처럼 ‘고용안정 및 일자리 창출,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산별노조화에 대한 보장’은 먼저 해결돼야 할 과제이다. 정부가 이 정도의 양보를 할 의사를 갖고 있느냐가 사회적 대화에 결정적이다. 혹자는 이를 “정부의 안정적인 개혁성향이 사회민주당의 존재를 대신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부와 여당이 개악된 파견근로법 및 기간제근로법 처리를 강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끊임없이 시도된 대통령의 ‘대기업 노동조합 때리기’ 언술이 무엇을 겨냥한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극우·수구세력의 참주선동에 맞서 자신의 지지자를 결집시키기 위한 정치공학 차원의 ‘반노동 사회적 포퓰리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민주노총이 총력투쟁과 총파업을 남발했음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파견근로법과 기간제근로법 개악에 맞선 양대노총의 이번 총파업에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설사 이번 총파업이 다른 계급·계층의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을 더 부추기는 부작용이 있더라도 그렇다. 그것이 ‘피티통전’을 위해 한국 노동운동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맞닥뜨리는 게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교육·정책국장 조준상 cjsang21@hanmail.net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정신에 바쳐진 노래들

「이성선」에서 청명한 계절은 오래 머물러 있었다. 맑고 쓸쓸하고 깊은 행간에서 이성선의 얼굴과 시세계가 얼비칠 정도로 김사인은 고인(故人)을 텍스트로 불러와 아주 적은 말로 느리게 송사(頌辭)하고 송사(送辭)한다.“어느 우주로 그는 흩어졌단 말인가”에서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終詩」)라고 삶의 마침표를 생략한 박정만의 끝 간 데 없는 막막한 공간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시의 공간은 마지막 행에서 다르게 연주된다. 우주에서 되돌아와 ‘우주’를 ‘우물’과, 이성선 시인(시세계)을 ‘두레박’과 등치시켜 읽는다면 ‘두레박 소리’는 새삼 크고 차가운 울림으로 정신을 일깨울 것이다. 정갈한 정신을 길어올리기 위해 우주라는 우물에 몸을 던지는 이미지는, 물방울 하나에서 우주를 보아버린 고인의 시세계와 서로 교통하고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짧은 진혼곡은 이러한 공간적 변주와 확장으로 떠나간 시인을 오래 울리게 할 뿐 아니라 한 편의 시로도 탁월한 성취를 이뤄낸다. 고형렬의 「달려라, 호랑아」는 자화상을 객체화되고 즉자적인 호랑이의 육체와 질주로 대상화해서 분해한다. 시인은 날카롭게 벼린 언어로 끔찍할 정도로 세밀하게 대상을, 자아를 썰어내고 해체하고 농락하는 동시에 야유와 연민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전술로 거두는 효과는 행간에 점포를 낸 정육점 고기처럼 비위사납게 하고, 내장·근육·뼈·살점·생식기 들이 덜렁덜렁 역동적으로 매달리게 한다. 그리하여 “모자이크 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이라는 잔인한 표현을 낳는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또 독자에게 질문한다. 지금 어디를 향해 그리도 ‘더러운’ 질주를 하고 있느냐, 세상의 조각나고 모자이크 된 모든 ‘나’들이여. 시 안에서의 발언과 표현, 공간을 온전히 시인의 현재의 삶과 동일시하는 것은 미숙한 독법이 되겠지만, 박영근의 「낡은 집」을 읽고 나면 어쩔 수 없이 시인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고열에 들떠 약을 먹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식은땀에 젖은 얼굴이 창에 비칠 때, 문득 가을볕 외로운 고향 빈집 마당에 버려두고 온, 보는 사람 아무도 없을 국화며, 봉숭아 씨방이 궁금해지듯, 얼굴도 모르는 시인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화자가 걸어왔을 가파른 시대와 단칸방과 ‘막벽돌의 금’과, 포크레인 아래 무너지는 집들과, 또 마당 한 귀퉁이의 꽃들과 꽃대를 돋우는 ‘여자’는 독자를 텍스트 안으로 강력하게 끌어들이고 같이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이 투명한 시적 승화를 동행하게 한다고 하더라고, 시인이 아프지 않길, 너무 고통스러워 통증이 사라질 정도로 오래 아프지 말길 바랄 뿐이다.

서울시 양천구 목동 박현일

 

세상의 모든 기린을 위하여

날이 갈수록 사는 일이 팍팍해지고 옹색해지고 쩨쩨해진다. 결정적으로 우스워진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악착같이 가벼워지고 싶다. 그래서 ‘날아갈 듯 가벼운’ 것들에, 그런 스타일에 끌린다. 박민규 소설은 ‘가벼워서’ 이 지구를 떠메고 날아갈 만큼 가벼워서 좋다. 존재의 무거움을 고매하게 다루지 않아서 좋고, 무거움을 가르치려 하지 않아서 좋다. 결정적으로 너스레와 개그로 중무장한 가벼움이, 그 가벼움의 속살이 눈물나게 맵고 짜고 시어서 좋다. 그의 가벼움은 바람조차 가를 수 있는 진검처럼 보인다. 그런고로 잡지 겉표지에서 박민규라는 이름을 봤을 때, 솔직히 ‘이거, 재밌겠는걸!’ 했다. 그가 ‘창작과비평’이라는 무거움을 어떻게 벨지 기대가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진검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멋진 소설이었다.‘원래 좀 노는 편이었던’ 상고생의 남루한 일상을, 주유소와 편의점과 지하철을 오가는 알바맨의 성장통을 그토록 쿨하게 가슴시리게 그려내다니.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 가능한 알바 소년은 카프리썬 하나를 사서 누군가에게 준다면, 자기 인생의 이십오분을 준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것을 ‘나의 산수’라고 말한다.“인간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산수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을 발견하게 마련이다.” 수학이 필요 없는 산수 인생. 그는 그런 인생들이 꼭 타야만 하는 통근열차의 푸시맨이 된다. 새벽의 전철은 늘 은하철도와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거기서 튕겨나온 ‘아버지’를 만난다. 알바 뛰는 아들에게 “미안하구나”라고밖에 말 못하는, 꼬박꼬박 도시락을 먹으며 마흔다섯에 시간당 삼천오백원의 산수 인생을 사는 아버지. 그는 푸시맨 아들에 의해 통근열차에 태워지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의 아버지는 사라진다. 어느 봄날, 역사 벤치에서 졸다 깬 소년은 건너편 플랫폼 지붕 부근에 떠 있는 기린, 아버지라는 확신이 드는 기린을 만난다. 기린이라니! 이렇게 딱 맞는 이미지는 없을 거다.

소년의 독백을 따라 하는 버릇이 생겼다. 툭하면 “화성인들은 좋겠다” “금성인들은 좋겠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면 그런 상념에라도 빠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그 소년이 보고 싶어진다. 그러면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왜냐고 묻는 건 어리석다. 존재의 무거움을 무거움으로 이겨내기엔 나는 너무 지쳤다. 이제 작가에게 더 크고 새로운 기대를 건다. 가벼움의 날개가 너무도 튼튼해서 이 땅의 무거움을 떠메고도 훨훨 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경기 안산시 월피동 495-17 이정은

 

「화씨 9/11」 영화평과 마이크 쎌던의 논단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에 대한 김종광의 평은 솔직히 실망스럽다. 부시가 대통령이 되던 4년 전의 석연찮은 개표과정에서 시작해 부시 일가와 빈 라덴 일가의 밀착, 더 나아가 중동 산유국과의 유착 등을 폭로하는 이 영화는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평자는 이 영화만으로 미국의 구성원 모두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마이클 무어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미국의 죄를 용서받자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진대 평자는 번지수를 아주 잘못 짚었다. 물론 미국의 야만적인 이라크 침공과 일련의 학살에 분노하는 충정과 영화가 성에 차지 않음도 이해하겠다. 그러나 분노만을 표출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영화다. 영화평의 성급한 결론과는 대비되는 글이 마이크 쎌던의 논단이었다. 미국인이기에 이렇게 차분한 글을 쓸 수 있지 이라크나 아프간의 국민에게는 이런 글은 한가함일 뿐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미국의 점령통치가 예전 일본에 비해 이라크와 아프간에서는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더 안 좋아졌는지를 조목조목 짚고 있는 이 글은 세계의 경찰을 자임했던 미국의 몰락을 그 어느 글보다 설득력있게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 마이클 무어와 함께 이런 양심적 지성이 있다는 게 한반도에 사는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을 위해서도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호치민도 베트남 통일전쟁을 치를 때 미국내 반전여론을 전략적 변수로 고려했다지 않는가. 미국 지성인 덕분에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제동이 걸리기를 기대해본다.

부산시 해운대구 좌동 이시원

 

역사교육이 중요한 때

지난 여름호에 실린 이영호의 논단 「고구려의 ‘역사’와 동북아의 ‘현실’」을 읽을 즈음 매스컴에선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기사가 불이 붙어 있었다. 뒤늦게 알게 된 역사 왜곡에 놀랐고, 국민들의 반응에 놀랐다. 냄비근성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무지에서 오는 역사의식으로 도배된 인터넷이나 시민의 반응은 역사가 왜곡당해도 마땅하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바뀌어버린 국사, 이제 우리 역사에 더 몽매해질 것이 틀림없다. 아마 ‘고구려가 어느 나라냐’고 묻는 십대도 생기지 않을지…… 교육은 고삐가 풀렸음에도 정치적으로는 목소리가 높다. 먼저 우리의 역사를 꼼꼼히 배우고 익힌 다음 역사를 왜곡한 중국이나 일본에 대응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창비가 역사교육에 대한 내용도 실어주었으면 한다.

경북 영주시 박정원 rosa354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