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

 

민주주의는 어떤 ‘기분’인가

김금희와 황정은의 최근 소설들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역서 『패니와 애니』(공역) 『도둑맞은 세계화』,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니다

 

사실상 사망을 선고받은 권력이 문자 그대로 ‘사력’을 발휘하는 광경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살아 있는 죽은 것이라면 좀비가 아니겠는가. ‘내부자들’의 온갖 작태를 다룬 영화들이 그러했듯 ‘오컬트’로 분류된 「곡성」(2016)마저 알고 보니 다큐였던지 샤머니즘에 좀비가 결합한 장면들이 현실에서도 펼쳐지는 중이다. 좀비 상상의 역사는 유구하고 다채로워서, 자본주의체제의 맹목성과 기생성이 ‘좀비 자본주의’로 표현되는가 하면 집단적 파괴력에서 혁명의 주체를 연상하기도 했다.1) 죽었으되 삶에 기생하는 체제의 비유로도 쓰이고 죽어라 억눌려도 여전히 움직이는 저항세력의 비유이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좀비는 “거의 전적으로 종말의 이미지로 통용”2)되는 것이 특징이다. 종말의 이미지로서 그것은 무엇보다 종말이라는 것이 어떤 속성을 갖는지를, 혹은 종말 자체는 결코 종말이 아니라는 점을 일러준다. 끝날 때까지는 끝이 아닌데 끝이란 다른 무언가의 시작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로운 시대가 실제로 시작되지 않고는 진작 끝났어야 마땅한 이 권력도 아직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끝났다고 생각되는 것이 살아 있는 척 남아 있듯이, 사라져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할 수도 있다. 트럼프(D. Trump)의 대선 승리가 확정된 다음날,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페이스북을 통해 “다음날 아침 해야 할 일”(Morning After ToDo List)이라는 리스트를 제출했다(2016.11.9). 리스트는 “민주당을 접수하여 민중에게 돌려주라. 그자들은 처참하게 우리를 실망시켜왔다”라는, 이 시점의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요청으로 시작해 ‘다수’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자는 다짐으로 끝난다. 미국 시민 ‘다수’는 기후변화가 실재한다고 믿고 남녀평등과 빚에 쪼들리지 않는 대학교육과 최저임금 인상과 보편적 의료보장을 지지하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데 반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마지막의 이 다짐이 절실하고 현명한 처사로 보이는 이유는, ‘이명박근혜’ 정부를 거치는 사이 집권세력을 향한 분노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던 감정이 바로 우리 자신까지 포함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불신이었기 때문이다.

촛불광장은 정권교체를 거의 성취하고 시대교체의 과제를 분명히 한 데 더하여 우리 자신과 화해하고 동료를 향한 신뢰를 재발견하게 해준 점에서 혁명의 시간이자 치유의 시간이었다. 그간 이곳이 ‘헬조선’임을 실감케 하는 ‘갑질’이 어떠했으며 처절한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선택이라는 자조는 어떠했던가. 아니 각자의 도생마저 번번이 꺾어놓는 상황이었기에 광장의 시간은 더 놀라웠고 지나온 나날들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혁명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는 또한 새삼스런 경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와 연대감같이 사라진 듯 보이던 민주주의적 감정들이 ‘잠재성’의 형태로 실재해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없음”이 된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3)이었던 것이다.

 

 

2. 어떻게 가만히 있었던가

 

촛불혁명은 실제로 광장에 나오거나 지켜보며 지지한 사람들을 변화시킨 동시에 그들에게 ‘이미’ 일어난 변화를 기록한 사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나온 ‘사이다’ 발언들이 그 증거였다. 그런 점에서 D. H. 로런스(Lawrence)가 말한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진정한 개별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심지어 자기 내부에서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또 이해하고자 한다. 언어화된 의식을 향한 이 싸움은 예술의 전유물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삶의 일부다. 이론을 보충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정적인 싸움(passionate struggle)이다.4)

 

광장은 권력을 퇴진시키는 싸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이고자 하는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알고 또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적인 싸움’의 현장이었다. 그 싸움을 통해 무엇보다 우리가 누구인지와 민주주의란 무엇인지가 같은 질문임이 ‘수행적으로’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대통령과 국회가 헌법기관이라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권력기관”5)이라 체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둘 사이의 간극은 논리가 기계적으로 작동한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국회 탄핵가결 촉구 집회에 나가며 “내가 가야지 가결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어느 시민의 말처럼,6) 그것은 많은 이들의 내부에서 내가 나서지 않고는 안 되겠다, 꼭 내가 나서야겠다,는 어떤 ‘기분’ 혹은 감정이 발동했기에 일어난 비약이었다.

이런 기분이 누구도 나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좌절감의 다른 이름이며 거기에 담긴 ‘대의민주주의’의 실패 혹은 그에 대한 불신이 우려스럽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촛불은 좌절 끝에 환멸하거나 좌절 자체를 유일한 비전으로 활용하는 세력에게 만사를 내맡기는 대신, 스스로를 대변하는 행위를 통해 제대로 대변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시연했다. ‘주권권력기관’으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곧 ‘민의 자치’로서 민주주의를 세우는 일이라는 인식이 촛불의 ‘열정적인 싸움’이 거둔 소중한 앎이고 이해다. 아득해 보였던 개인과 광장의 거리는 이 앎과 이해의 힘으로 일순 메워진다.

그러나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린’ 이 정권이건만 세월호에서 광장까지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결정적 국면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를 진작 실천해온 세월호 유가족, 생존자들과 활동가들의 지난한 싸움이 없었다면 오늘의 광장이 어떻게 가능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참사 당시조차 ‘가만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