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촛불혁명, 전환의 시작

 

기로에 선 세계경제와 우리의 선택

 

 

유철규 劉哲奎

성공회대 교수, 경제학. 영국 옥스퍼드대학 및 런던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공저 『협동과 연대의 인문학』 『한국사회의 쟁점과 전망』 등이 있음. yoocg@skhu.ac.kr

 

 

1. 현실이 된 미국 패권의 몰락

 

2017120일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127일 특별관심국가로 분류한 이라크, 이란, 시리아, 예멘, 리비아, 수단, 소말리아 등 이슬람 7개국 국민에 대해 90일간 미국 입국을 금지하고 120일간 난민수용을 중단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야기했던 갈등을 이번에는 훨씬 넓게, 말 그대로 전세계적 차원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이보다 앞선 123일에 트럼프는 12개국이 참여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이 탈퇴할 것을 공식선언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은 다자간 협정을 파기하고 개별국가와 일대일 양자협상을 통한 무역협상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 두 조처만으로도 트럼프정권의 대외정책이 갖는 성격은 ‘폭력에 기반한 적()과 갈등 만들기의 세계화’라는 것이 극명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성공할지 알 수는 없지만 G2로 부상한 중국에는 냉전시기의 소련이 했던 역할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 전략은 반중국, 친러시아, 반유럽연합(EU는 다자간 협정의 결정판이다), 반이슬람, 반국제협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후보 시기의 공약단계에서는 어디까지가 선거용 혹은 대외협상용인지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일극체제의 세계경제질서가 과연 어느 정도 안정적이며 지속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된 지도 오래다. 한편에서는 후꾸야마(F. Fukuyama)식으로 자본주의의 승리와 맑스적 역사의 종결을 선언한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2차대전 이후 보여준 전쟁국가로서의 미국이 적이 없어진 시대에 안정적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트럼프정권의 선택은 후자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다. 이는 동시에 극우적인 인종주의와 남성우월주의 등과 결합해 대내적으로도 적을 만들어내고 갈등을 높여 미국이 처한 위기를 돌파하려는 선택이다. 미국 내 백인들, 특히 중하층 백인 노동자들의 좌절과 분노에 대부호 트럼프는 숟가락 얹듯 편승했다. “너희들의 적은 기업과 자본, 그러니까 우리가 아니다. 적은 원정출산과 범죄를 일삼는 소수민족이며, 더 큰 적은 국경 밖에 있다. 백인들이여, 다시 일어서서 소수자, 소수민족, 유색인종, 여성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던 권리를 되찾자. 그것이 위대한 나라다.” 필자의 이 해석이 월가에 밀착한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에 대비해 노동자의 전사를 자처한 트럼프를 제대로 읽은 거라면, ‘기업을 압박해 일자리를 만든다는 공약’은 허구의 정치쇼다. 개별기업 몇개에 압력을 가해 늘어나는 일자리는, 단 1~2%의 불가피한 금리 인상만으로 그 몇배, 몇십배가 사라질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는 그 대신 기업에 파격적인 규제완화와 감세를 약속했다. 자칭 노동자의 전사가 택할 것은 친()기업이다. 미국의 자본과 극우세력은 “우리는 99%다”라고 외쳤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그 에너지마저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이 치러야 할 댓가는 훨씬 크다. 오바마(B. Obama) 대통령이 퇴임한 지 겨우 10일 만에, 초기에는 전임자가 새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고 트럼프의 반이민·반난민 행정명령을 비판하는 성명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오바마는 “미국의 가치가 위태로워졌다”고 했다. 미국의 가치란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리킨다. 미국은 군대와 경제만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미국이 (비록 형식적인 것이었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잃는다면 수십만 군대를 잃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의 상실을 겪을 것이다.

중국이 트럼프의 공격적인 이른바 ‘신’통상정책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술 더 떠 시 진핑(習近平)117일부터 21일까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세계의 정계, 경제계, 학계, 언론계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앞에 두고 트럼프의 미국을 대신해 중국이 자유주의 세계경제질서를 책임있게 끌고 가겠다 선언했다. 시 진핑은 그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해 세계화는 적극적으로 관리되어야 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개방(tolerance of differences)이 이루어져야 하고, 각국이 항상 자국의 국가발전계획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새로운 세계화의 개념과 길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동안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법치는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핵심 개념과 가치였는데, 이제 미국이 그것들을 버리고 경제와 군사력으로만, 즉 중국과 같은 운동장으로 내려오겠다는 것이니 오히려 반갑지 않으면 이상하다. 실제로 중국이 어느 정도까지 시 진핑의 선언에 충실할 수 있을지 회의가 만연하기는 하지만,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독점적으로 장악해왔던 가치와 이데올로기 공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단기적으로 보더라도 TPP의 파기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설치하고 있던 경제블록화 작업을 중단하는 것이므로, 중국으로서는 ‘메이드 인 차이나 2025’나 ‘첨단기술굴기’ 등에서 표현된 내부 불균형의 해소와 자체성장 기반 강화에 주력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되었다.

공격적이고 자기파괴적인 미국의 선택과, 내수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으면서 각국이 자국의 국가발전계획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중국의 세계화 선언. 만약 중국의 선언이 현실이 된다면 양자 간의 승패는 자명하다. 2000년 방영분의 「심슨 가족」(The Simpsons)에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예견했다고 알려진 작가 댄 그리니(Dan Greaney)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건 미국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의 마지막 수순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