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은 휴전선이 아닌 내 마음에 있었다: 외할머니의 눈으로 분단 공간 다시보기

강주원

강주원                          

압록강 넘나들기를 기록하면서 나의 뿌리를 말하다

 

어쩌다보니 2000년부터 두만강과 더불어 리영희 선생님의 고향인 삭주를 휘돌아 흐르는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걸을 일이 많아졌다. 북한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중국의 국경 도시 단둥이 나의 주 연구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동안은 연구 기회가 닿았을 뿐이고 우연한 운명이라고만 생각했다.

 

단둥에서는 북한사람, 북한화교, 조선족, 한국사람의 관계맺음이 아파트, 식당, 회사 등 다양한 곳을 중심으로 30년 넘게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인류학자로서 나는 이들의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남북 교류와 만남이 한반도 밖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기록한다. 예를 들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2020)이 얼마나 현실에 바탕을 두었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나의 일이다.

 

압록강 넘나들기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관계성은 훨씬 다층적이다. 압록강을 넘나드는 이들 중에는 북한에서 북한사람으로 살다가 화교로 정체성을 바꾸는 사람도 있고, 중국으로 이주한 뒤 중국 호구를 받았으나 201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국적과 민족만으로 고향을 섣불리 짐작할 수 없는 이곳에서 그들은 나에게도 출신을 묻곤 했다. 처음에는 서울 태생이라고 말했다가 점점 대답이 길어졌다. 아버지의 고향은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이 숨어 있던 지리산 자락이고, 어머니의 뿌리는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개성 언저리라고 덧붙이곤 했다.

 

그동안 보고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의 이산가족은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노란 손수건을 흔들기도, 중국에서 직접 상봉하기도 했다. 남북을 오가는 서신을 전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서신은 1990년대부터 한해도 빠짐없이 통일부 통계에 잡혀 있어, 누적 일만여건에 달한다. 나도 외할머니와 그의 가족을 이렇듯 민간 차원의 만남과 서신 교환을 통해 연결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외할머니는 내 곁에 계시지 않는다.

 

반쪽 뿌리를 모른 채, 임진강과 DMZ 안과 밖을 다녔다

 

2020년부터 연구 지역이 추가되었다. 파주와 연천의 임진강 그리고 DMZ 안팎이다. 이전에도 임진강 하류 너머 북한 산천 어디쯤이 나의 뿌리 반쪽의 터전일까 궁금해하곤 했지만, 구체적인 위치를 찾거나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동안 놓쳤거나 몰랐던, 아니 알려진 사실과는 동떨어진 분단 상황을 들여다보고 확인하기에 바빴다. 가령 ‘DMZ를 사이에 둔 남북의 거리는 4킬로미터인데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북한 육지까지는 왜 2.1킬로미터일까?’ 질문을 하다가 그곳에는 DMZ가 없다는 답을 찾기도 하고, ‘한강 하구와 임진강 하류에는 휴전선이 없는데 파주 곳곳에 설치된 지도와 인터넷 지도에는 누가, 왜 유령의 휴전선을 선명하게 그어놓았을까?’ 묻기도 했다.

 

이런저런 퍼즐을 맞추어보아도 질문은 자꾸 꼬리를 물었다. 2021년 로마에서도 전시되었던 ‘평화의 십자가’는 애초 휴전선 철조망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 휴전선엔 철조망 없이 1292개의 말뚝만 서 있다. 평화의 십자가가 실제로는 동해안 철조망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았을 땐 사실 왜곡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동시에 휴전선에 철조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바로 눈치 채지 못했는지, 어째서 감동만 했는지 스스로에게 또다시 묻게 됐다. 대다수 사람들은 휴전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남방한계선의 철조망 역시 1968년 전후 만들어진 것으로, 1945년 분단 이후 23년여 동안 남북 사이에 길게 이어진 철조망은 없었다. 나는, 우리는 어떤 한국사회에서 살아왔기에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할까? 분단 문화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난 것일까? 우리는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 1960년대 전후 파주 임진강 언저리의 삶과 분단 문화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나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이 지역의 삶을 최근 2년간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이곳을 나의 뿌리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도 그런 점을 구체적으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외할머니의 눈으로 임진강과 DMZ 안과 밖을 들여다보았다면

 

얼마 전 어머니 집안의 역사를 많이 알고 계시던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버지 대신 사위 역할을 한다는 마음으로 처음 외가의 벌초에 따라갔다. 육촌형들을 따라 도착한 곳은 고랑포구 역사공원 근처였다. 내 뿌리 반쪽의 터전이 막연히 개성 왼쪽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었다. 오른쪽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연구를 위해 오갔던 연천 호로고루(瓠蘆古壘)성이 시야에 들어오는 언덕, 그곳에 집안의 선산이 있었다. 북에서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 모형이 2002년 남북협력사업을 통해 호로고루성에 세워졌다는 것,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록해왔으면서 정작 나의 반쪽이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졌다. 가공의 분단장벽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라고, 나의 무관심 탓만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2000년 처음 압록강을 찾아가던 시절부터라도 나의 뿌리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가령 내가 외할머니의 이야기에 좀더 귀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구술사 연구를 통해 수집한 일제강점기, 광복 전후, 38선과 휴전선이 만들어지던 시기 임진강 언저리 주민들의 경험담이 나의 집안 어르신들의 체험과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고랑포에 화신백화점이 있었다는 것은 문헌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1920년대 초반생인 외할머니가 학교에 다니면서 본 바로 옆 건물인 줄 그동안 몰랐다. 사촌동생이 알려준 외할머니의 호적상 주소 역시 허무하게도 인터넷으로 위치가 쉽게 검색되었다. 휴전선과 DMZ 너머 북쪽이었다.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이 태어난 곳을 걸어 다닐 수 있는 생활권이었다. 육촌형이 어림짐작으로 손으로 가리킨 집안의 옛 생활 터전은 38선과 휴전선 사이였다. 집안 어르신 중에는 임진강을 건너 등하교한 분도 있단다.

 

내 삶과의 연결고리는 없다 생각했던 임진강이 그렇게 눈앞에서 흐르고 있었다. 분단 이전에 내 조상이 걸어 다니고 농사지으면서 살아온 터전이었음을 좀더 일찍 알고 외할머니의 눈으로 이곳을 들여다보았다면 이 지역을 더 겹겹이 선명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깊어졌다.

 

2023년이면 한국전쟁 정전협정문을 작성한 지도 70년이다. 그 세월의 무게를 뛰어넘어 임진강, 38선, 휴전선 언저리에 녹아 있는 분단 문화를 있는 그대로 남긴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휴전선엔 철조망이 없다’라는 나의 책 제목을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가 아닌 은유로 받아들이곤 한다. 분단 문화에 대한 이런 왜곡, 무지, 무관심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데 도움이 될 연구는 또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한국사회가 남북관계 변화의 계기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이 한반도 안과 밖, 두만강과 압록강과 임진강에, 그리고 철조망 없는 휴전선에 있다.

 

 

강주원 / 인류학자

2022.9.20. ⓒ창비주간논평